사실상 2일차인 3일차.
어김없이 우리는 늦잠을 잤다. 전날보다 딱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났을까? 열시 반쯤에서야 부스스...
아침 겸 점심을 챙겨먹기로 했는데 첫 번째 가려던 식당은 줄 때문에 포기, 두 번째 가려던 식당은 문을 닫았다. 구글 리뷰를 보니 최근에 주인장이 돌아가셨다고. 맞은편 블록에 있던, 한국인들도 많이 간다던 차찬텡 집인 <미도 카페>에 갔다. 나는 미도식 볶음밥을, 친구는 미도식 국수를 주문했다. 미도식 볶음밥은 입맛에 맞았지만 내장부터 향신료 한가득이었던 국수는 정말이지 힘들었다. 한 가지 더 인상적이었던 것. 홍콩의 밀크티는 달지가 않다. 다른 맛이 더 있는가? 그건 아니고, 딱 한국에서 마시던 밀크티에서 단 맛만 쏙 빼내면 날법한 맛이었다. 처음엔 입에 잘 붙지 않았지만 몇 모금 홀짝거리고 나니 나쁘지 않았다. 다음날부터는 슬슬 익숙해졌던 것 같기도.
전날에 홍콩섬과 침사추이를 걸었으니 북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목적지는 무간도에도 나왔던 만불사와 마찬가지로 샤틴역 근처에 있는 홍콩문화박물관. 샤틴역에 내렸더니 침사추이나 홍콩섬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전형적인 신도시 느낌? 물론 아파트의 고도와 밀집도는 홍콩의 그것 자체였다. 여기가 바로 신계 지역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만불사와 홍콩문화박물관의 가장 큰 특징. 한국어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
만불사는 무간도 1편 첫 장면의 배경이다. 팔을 길게 뻗은 불상, 배 안에 다른 불상이 있는 불상, 악귀 머리를 밟고 있는 불상 등 진입로 비탈길에 각양각색의 불상이 좌우로 놓여있다. 대웅전 격의 전각에 가면 소형 불상이 층층이 건물의 3면을 메우고 있었다. 해탈의 길을 걸어 구도자의 길을 걷는 그 시간, 한 사람의 시간만 해도 엄두가 나지 않는데 만 명의 시간은 대체 어떠할까? 한 사람의 인생을 압도하는 억겁의 시간이 쳐다보는 듯한 느낌.
샤틴 역을 걸어 홍콩문화박물관으로 향하는 길. 일요일이라 그런가 가사도우미들이 돗자리를 깔고 역 앞 공터에 바글바글 앉아있었다. 주말에는 홍콩인 가족들끼리 집에 모이느라 가사도우미들이 어쩔 수 없이 바깥에 나와있다는 설명도 들었고 정반대로 그런 개념이 아니라 휴식을 취하러 나가는 것이라는 설명도 들었는데 어느 설명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아직 모르겠다.
다만 이날 밤에 홍콩섬 성요한성당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었는데, 좁은 인도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휴대전화로 조명을 밝히며 마작과 이름모를 도박을 즐기던 여성들이 많았던 것으로 볼 때 신계부터 홍콩섬에 이르기까지 가사도우미들이 길거리 말고 달리 여흥을 즐길 공간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다른 공간이 있다면 어디일까?
홍콩문화박물관엔 뭇 박물관에 있는 전형적인 상설전시와 제임스 웡 특별전, 이소룡 전시실, 김용 전시실이 있었다. 이소룡이 입던 노란색 추리닝과 스파링 연습을 하던 기구, 미국에서의 학창시절 성적표 등등 별게 다 있었다. 김용은 솔직히 잘 몰랐던 인물인데, 말로만 듣던 의천도룡기와 신조협려가 다 이 사람 작품이구나 처음 알았다.
두 군데만 둘러봤을 뿐인데 시간이 많이 흘러 다른 일정을 다 접고 바로 다시 홍콩섬으로 향했다. 관광을 왔는데 피크트램은 타고 가봐야 한다는 집념을 하필 일요일에 풀기로 한 것이다. 돌아보니 일요일에는 월요일에 문닫는 전시관들을 좀 가고 월요일에 빅토리아 피크를 갔어야 했던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날 기분은 또 그날 푸는 맛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아직 시간이 15시경. 뭔가 아까워서 피크에 오르기 전에 아시아 소사이어티 홍콩센터라는 곳에 가보기로 했다. 그전날 가보려다 18시 폐관시간에 쫓겨 포기했던 일정. 아주 한적한 전시관이었는데 미술작품도 짧은 식견으로 보기 나쁘지 않았고, 영국군이 탄약고로 쓰던 건물들을 활용해놓은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드러누워서 하늘을 보던 친구를 보며 아무데서나 편하게 눕기 바쁜 천성이 부럽기도 하고, 그걸 또 따라 누워보니 홍콩에서 이렇게 한적한 공간이 있나 싶은 생각과 함께 잠시잠깐의 여유도 맛볼 수 있었다.
홍콩공원을 거쳐 피크트램으로 향했다. 홍콩공원에도 차 관련한 무슨 박물관이 있었고 그 건물도 옛 영국군 고위관료가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하지만 갈길이 바쁘므로 패스. 옛 건축물 보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걸 다 챙겼다간 아마 여행기간이 모자랐을 것이다.
피크트램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줄을 자랑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줄 옆에 19세기부터 지금까지 피크트램의 역사가 영상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던 시절부터 세 차례 개량을 거쳐 대용량 트램이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30분 정도 기다린 듯한데, 그정도 개량이 아니었다면 아마 두 배의 시간을 들여 기다려야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램 때와 마찬가지로 직업병... 피크트램의 견인원리로 살짝 대화를 나누었는데, 암만 봐도 철차륜으로는 저 구배를 타고 오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궁금증은 나중에 내려오는 길에 풀었는데, 줄로 잡아당기는 아주 확실한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빅토리아 피크에 오르니 첫째, 날이 쌀쌀했고, 둘째, 역시 다른 각도에서 경관을 보는 것이 주는 매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같은 공간이지만 바다에서 보는 광경과 산 위에서 보는 광경은 얼마나 다른가? 앞과 뒤, 옆면과 윗면을 볼 때 각각 생각과 느낌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른 각도에서 충분히 상상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겪으면 역시 직접 부딪쳐야 하는 게 있다고 깨닫곤 한다. 관광이라는 걸 평가절하하고 싶다가도 막상 겪고나서 느끼는 게 있다보니 나의 인식능력과 추론능력의 한계를 어김없이 느끼고 간다. 그리고 동시에 여행에 들이는 시간과 비용을 한 번 정당화하고 간다.
아직 일몰시간이 되지 않아 잠시 주변을 둘러보기로 한다는 게, 잘못해서 루가드 전망대로 가는 길로 접어들어버렸다. 처음엔 루가드 전망대라는 게 있는줄도 몰랐다가 계속 걷다 보니 이게 어디까지 가는 걸까 싶어 지도를 찾아보고 알게 된 코스였다. 오히려 잘 된 셈. 걷는 동안 어느새 해가 졌고, 마침내 도착한 루가드 전망대에는 나뭇가지가 시야를 가리는 곳만 빼고 빼곡하게 사람이 가득차있었다. 사진 몇 장을 건진 뒤 다시 하산. 빅토리아 피크 유료 전망대 꼭대기에도 사람이 가득했으나 전망대 대신 전망에데 바글거리는 사람들만 구경하고 내려왔다.
이날 저녁은 완탕면에 도전. 내 성미상 줄서서 먹는 걸 싫어하지만 이제부터는 둘 다에게 피로가 몰려와서 그냥 줄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홍콩 식당 특유의 합석문화 덕분에 우리 둘이 옆에 나란히 앉았고, 앞에는 또다른 두 사람의 여행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합석. 앞자리에 한국사람들이 올 것 같다는 예감이 적중했다. 우리는 한 마디도 입을 떼지 않고 열심히 면발을 흡입하고 자리를 나섰다.
MTR을 타고 다시 구룡반도로 돌아왔다. 전날엔 침사추이 남쪽에서부터 걸어올라갔으니 이날은 몽콕에서부터 걸어 내려가보기로 했다. 그 김에 미리 봐두었던 서언서실이라는 2층서점에 들러보았다. 분명 지도를 찾아 갔는데 건물 입구는 어디? 새삼 홍콩의 수많은 건물을 보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들어가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킹맨션이야 워낙 대문짝만하게 입구가 있는 건물이었지만 이제까지 봤던 대부분의 건물이 쇠창살에 도어락이 달린 형태였던 것이다. 그나마도 이 서점 건물은 로비따위 없이 바로 한 층 올라가는 계단으로 시작했기에 찾기가 만만찮았던 것이다. 다행히 서언서실 한문 간판을 찾았지만 못내 의심하면서 계단을 올라갔고, 한 층 올라가니 나오는 엘리베이터를 보고서야 비로소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세척했을지 모를 엘리베이터 내부 에어컨에다가 작동시, 정지시 느껴지는 충격은 정말이지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는데 신기함을 넘어 살짝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서언서실 내부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우크라이나 전쟁부터 중국 역사, 바디우나 네그리 같은 서양사상가들의 책까지 다양한 분야의 인문, 사회과학 서적이 책장에 가득했다. 한국엔 번역되지 않은 오구마 에이지 선생의 <1968>같은 책을 보고 있자니 부럽기도 했다.
나서서 한 블록만 가니 레이디스 마켓이 나왔다. 평소에 관광객들이 입고 다니던 아이러브 홍콩 티셔츠를 대체 어디서들 사는걸까 했더니 레이디스 마켓에 지겨울 정도로 많았다. 이날은 레이디스 마켓과 몽콕, 야우마테이 주변 번화가를 잔뜩 구경했다. 그리고 저녁을 면으로 떼운 탓에 졸리비에 가서 버거와 샐러드로 야식까지 떼우고 돌아갔다. 졸리비에서는 가장 전형적인 대표메뉴 같은 걸 주문했는데, 양상추도 들어있지 않은 걸 보고서 살짝 당황스러웠다. 여하튼 배를 채우고 3만 보 정도 걸은 3일차 하루도 마무리. 이날은 나름 루틴에 적응이 되어서인가? 푹 쓰러지듯 잠을 자지 않았고, 그 덕에 물 떨어지는 소리, 이름모를 환풍기 소리에 몇 번이나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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