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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샤이델, <불평등의 역사>

노양 2022. 2. 8. 02:02

질기고 질긴 불평등의 역사를 직면하는 자세
 
  평등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경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저자 발터 샤이델은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평준화 사례를 분석하여 그 경로를 크게 네 가지로 정리했다. 대중 동원 전쟁, 변혁적 혁명, 국가 실패, 대유행병이다. 네 가지 평준화 요인의 공통분모는 '기존 질서의 대대적이고 폭력적인 파괴'였다. 저자는 이와 함께 이를 수반하지 않는,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는 평준화의 효과가 극히 미미하거나 일시적일 뿐이었음을 밝혔다.
 
  네 가지 평준화 요인 중 가장 강력한 효과를 거둔 것은 대중 동원 전쟁 및 변혁적 혁명이다. 대중 동원 전쟁과 변혁적 혁명의 대표적 사례는 양차 세계대전과 사회주의 혁명이다. 특히 총력전은 그 규모에 상응하는 강력한 조치를 필요로 했다. 최고소득세율은 90%에 달했고, 상속세는 몰수에 다름없었다. 생산과 분배 영역에 국가가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자본의 자율성이 심대하게 침해되었다. 한편 노동계급은 총력전 체제를 떠받드는 가장 핵심적인 기둥이었다. 강력한 평준화 조치와 노동계급의 성장에 따라 20세기 후반기 구미 열강의 노동계급은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향유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은 대중 동원 전쟁의 산물이었다. 애초에 총력전과 대중혁명의 토대가 같았다. 계급의식을 공유한 민중의 출현은 불평등 체제를 위협하는 요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 민중이 민족의식으로 조직될 때 이는 총력전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기도 했다. 노동계급의 성장이라는 동전의 뒷면은 국민군대의 완성이었다. 산업혁명과 근대국가의 성립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자본주의라는 씨앗이 제국주의의 성장과 함께 혁명과 전쟁을 거듭하며 100여년에 걸쳐 성장한 결과가 양차 세계대전이었다. 20세기 전반 체제변혁적 대중혁명이 조직적으로, 세계적으로 터져나왔던 까닭은 그만큼 위력적이고 세계적인 규모의 세계대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을 수반하지 않은 참전국에서도 노동조합과 노동자정당은 이후 반 세기 가까이 강력한 힘을 지녔는데, 이 또한 총력전 수행에서 노동계급이 차지한 막대한 지분과 자본가계급에 대한 강력한 국가 통제의 유산이었다.
  국가 실패의 대표적 사례는 당나라와 서로마제국 등 한 시기를 풍미했던 제국이 반란자와 침략자로부터 엘리트를 보호할 능력을 상실했을 때 발생한 지배층의 소멸이다. 지배층이 부와 권력을 재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국의 체계적인 국방 및 위기관리 능력, 조세제도와 신분제도, 사유재산제를 보증하는 법률체계가 담보되었기 때문이다. 그 국가 시스템이 체제 실패에 준하는 위기를 맞아 마침내 붕괴했을 때 엘리트의 독점적 부는 폭동과 약탈 속에 소멸할 수 있었다.
  마지막 요소인 대유행병은 유스티아누스 페스트, 그 유명한 14세기 페스트처럼 급격한 인구감소를 일으킴으로써 평준화를 촉진했다. 인구감소에 따라 비숙련 노동 종사자의 몸값이 상대적으로 큰 폭으로 뛸 수밖에 없었고 유행병이 수 년 주기로 되찾아오며 한동안 사회적 불평등이 심해지지 못하도록 제동을 잡았다.
 
  이에 비해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시기에 시도되었거나 유발된 평준화 요소의 위력은 하잘것 없었다. 양차 세계대전과 폭력혁명의 영향이 없이 좌파 또는 포퓰리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개혁을 단행한 남미 국가들에서 평준화 정책의 효과는 극히 미미했다. 그마저도 기존 지배층의 배를 불리는 조치로 이용되거나, 칠레의 사례처럼 극적으로 정부가 전복됨으로써 평준화 정책 자체가 소멸되기도 했다. 대공황을 비롯해 경제위기가 노동계급 투쟁을 촉발하거나 자본가들의 자산에 위기를 초래함으로써 평준화를 촉진했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효과는 거의 미미하거나, 경제위기가 고비를 넘긴 후 금세 복구되었다. 저자가 인용한 연구들에 따르면 좌파 정부에서도 한 세기 동안 전반적인 소득 불평등에는 아무 영향이 없었고, 상위 1퍼센트의 소득 점유율이 약간 둔화되는 효과만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된 네 가지 요인에 평등의 미래를 기대해야 하는 것일까? 일단 세계대전-세계혁명은 단기간에 도래하기 어려울뿐더러 핵무기 시대의 세계대전이 세계혁명의 전주곡이 될 수 있을지도 회의적이다. 총력전과 같은 강렬한 공통 경험과 지분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 급진적 혁명의 동력 또한 담보되기 어렵다. 단발적이거나 국지적인 혁명운동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국가 실패의 전망도 예측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당시로서는 급격한 일상의 변화를 유발했던 세계대공황조차도 일부 국가에서 일정 기간에 한해 평준화 동력으로 작용했음을 미루어본다면 2008년 경제위기 등은 체제 위기 축에도 들지 않는다. 특히 근대국가의 견고함은 봉건시대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무리 국가 실패에 가까운 국가라 하더라도 근대 사회에서 개인에 대한 동원과 통제 체계는 생각보다 촘촘하며 그에 기반한 대내외적 위기관리능력 또한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베네수엘라에서의 우익 반란 시도, 미얀마 군부 쿠데타 등 기존 정권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타격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감염병은? 저자도 인수공통감염병 등의 위협을 지적했지만 동시에 인류가 감염병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성장했으며, 특히 부를 독점하고 있는 자본가계급이 밀집한 선진국보다는 후진국이 감염병의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20세기 초반 에스파냐 독감만 보더라도 과거 페스트와 달리 이렇다 할 평준화 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페스트가 인구의 20~40% 가까이 감소시킨 위력적인 감염병이었음을 기억해본다면 코로나19와 같이 아무리 강력한 감염병도 과거와 같은 평준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불평등화 경향 앞에서 개개인 또는 특정 집단의 의지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사실상 전무하다. 질서의 붕괴는 의지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재적 요소에 따른 국가실패나 감염병은 인간의 의지와 거의 동떨어져 있는 요소들이다. 그나마 혁명이 평준화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인데, 이 역시 세계대전이라는 배경이 없이 성공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기존 질서가 위기에 처한 결정적 시기에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했던 이유, 혹은 혁명이 없던 국가들에서도 평준화의 효력을 오래 간직할 수 있었던 동인은 그 전 시기의 수많은 노력들에서 찾을 수 있다. 최저임금제, 소득세 및 상속세 도입, 노동조합 합법화 등 결정적 시기에 평준화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노동계급의 무기들이 이전의 투쟁에서 갖춰졌고, 그 투쟁을 지도할 당을 보유했기 때문에 결정적 시기에 사회혁명으로 전진하거나 그 직전 단계에 이를 수 있었다. 그 준비성이 약할수록 전진의 정도는 약했고 평준화 동력 또한 빠르게 떨어져 신자유주의의 빠른 반격을 허용했다.
  불평등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이전에, 근대 이전에 잉여가치를 만들어낸 인류의 역사와 함께하는 것이다. 좋건 싫건 그 조건을 인정하며 아둥바둥 질기게 살아온 것이 민중의 삶이다. 한 순간의 변혁으로 자본주의를 밀어낼 수도 없고, 밀어내서 다 해결될 일도 아니며, 일거에 불평등을 강력하게 완화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총력전과 혁명의 시대에 선배들은 바삐 달리느라 이같은 점들을 되돌아 볼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그 선배들의 공과를 포함해 역사를 짚어보고 그에 맞는 판단을 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몫이다.
  이 과정에서 구체적인 판단들을 해야겠지만 그전에 너무 낙담하지 말고 함께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한 걸음씩 평등운동의 규모와 영향력을 키워온 것 역시 인류의 질긴 시도였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모래알 만한 기여라도 하는 것, 그 시도의 일원이 되는 것이 운동의 의미다. 물론 천하가 혼란할수록 좋다는 모택동의 말처럼 혁명가로 살기에는 강력한 평준화의 시대를 직접 겪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그러나 그 삶 또한 평등의 흐름에서 보자면 99퍼센트의 목도와 1퍼센트의 기여로 구성된 것이다. 그 인생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답습하는 것도 좋지만 그 인생들도 결국 한 세기도 못 가는 평준화 시대를 만들었을 뿐임을 냉정하게 기억하며 인류의 긴 역사 속에 오늘 가야 할 길을 걸어가는 게 중요하다.
  평등을 꿈꾸는 혁명가로 살아가는 자세는 결국 '혁명은 터져나오는 것이지만 변혁은 터뜨리는 것'이라는 말을 명심하고 언젠가 터뜨릴 변혁을 위해 최대한으로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불평등이 심해지는 이 시대의 노력과 투쟁이 정세의 격화를 앞당길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할지라도 격화되었을 때 계급투쟁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수도 있다. 계급이 파시즘을 택하느냐, 공산주의 운동을 택하느냐의 갈림길을 대비하는 셈 칠 수도 있다. 평준화 운동의 방향으로 민중을 인도하고 투쟁 대오를 준비하기 위해, 총력전의 시대에 할 일이 있고 지금처럼 평준화 동력이 고갈되어 가는 시대에 해야 할 일이 있고, 국가 실패와 자연재해의 시대에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