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좌파 운동의 생생한 모습을, 그것도 연구자나 기자가 아니라 활동가의 시각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흔치 않은 기회였다. 한국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생생한 경험과 고민을 글로 옮겨준 덕에 조금이나마 갈증을 푼 기분이 든다. 일단 같은 시대, 다른 조건과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운동의 모습을 보며 한 발자국 멀리서 운동을 바라볼 때 할 수 있는 생각들을 오랜만에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노동자 국제주의라는 게 당위 내지는 과제로만 남아있는 느낌이었는데 현실의 문제로 끌어당겨준 덕택에 평소 잘 생각지 못했던 국제연대의 필요성이 확 와닿게 느껴졌다. 아마 저자는 중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추가적인 자료조사를 해서 학술적 성격의 글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고, 기타 여러 방식으로 해당 경험을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생생한 일화와 대화들을 중심으로, 생각과 느낌을 담아 이 책을 출간하기를 선택했다. 그래서인지 이 책 내용 자체가 흥미롭기도 했지만 동시에 긴 분량의 '국제연대 실천 제안서'처럼 읽혔다.
운동이란 틈새를 파고드는 것
저자가 소개한 중국 활동가들의 삶은 흡사 1980년대 노학연대를 실천하며 현장이전을 고민하던 선배 활동가들의 삶을 떠올리게 했다. 모여서 떠들며 의견 나누기를 즐기고, 학내외에서 교육, 선전활동을 벌이며, 책에서 그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서술되진 않았지만 운동의 노선을 고민하는 모습들을 읽으며 어딜 가든 운동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역동성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청년 활동가들의 생생한 모습은 새삼 이들의 운동이 있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생각하게 했다. 같은 운동을 두고서도 누군가는 의미있는 움직임이라고도 하겠고, 누군가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규모에 비해 작은 움직임이라며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역경을 거치며 이어온 좌파 운동의 명맥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거슬러 올라가면 문화대혁명 당시 조반파 좌파와 민간사상가들의 영향을 받거나 그 흐름을 만들었던 지식청년들이 하방했다가 뒤늦게 대학에 돌아오고, 그들의 후배들이 천안문 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다시 그들의 영향을 받아 자기 운동을 만들어가며 오늘날 중국 내 좌파 운동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 홍 동지가 만난 활동가들의 자기 정체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았고 운동의 흐름이라는 게 뭉뚱그려 정리하면 한 명 한 명의 활동가들에게는 다소 실례되는 일이지만, 여하간 지금 중국 내 좌파 운동 또한 백 년이 넘는 운동의 흐름 속에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들 사조가 유명하지는 않지만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만의 사유를 멈추지 않고 주체적인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중국 운동에서는 늘 좀 더 쉬운 길이 있었다. 중국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소련과 경쟁하던 나라였다. 중국 공산당 역시 전국 곳곳에 노혁명가 당원들이 살아가고 있고, 2000년대만 해도 전인대에서 소수안이 논쟁에 올라갈 정도는 되었던 의사결정구조를 갖춘 당이다. 공산당 운동의 주류에 묻어가거나 '내부에서 바꿔보겠다'는 선택을 해도 마냥 손가락질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완전히 청산파적 입장 내지는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파산 선고를 내리고 동떨어진 삶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좌파부터 천안문 세대, 지금의 청년 좌파 활동가들에 이르는 세력은 좌파 운동의 흐름을 이어가겠노라고 다짐하고 기꺼이 그 길을 걸어온 만큼 경의를 받아 마땅하다.
운동이란 현실과 당위 사이, 교조주의로 버티거나 청산주의로 흩어지거나 사이의 작은 틈을 선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저 혁명교리에 투철하기만 해서 마음만은 편한 길을 택하거나 반대로 다른 활동가들을 두고 공상적인 사람들이라고 비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운동, 시류에 영합할뿐 나중에 더 큰 환멸로 돌아오는 운동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길을 택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면서, 냉소와 비난을 감내하고, 열린 자세를 견지하기 위해 부단하게 자신을 되돌어보아야 한다. 중국 좌파 운동이 미약하지만 저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1957년 반우파 투쟁 이후로 박제된 마르크스주의라는 선택지와 냉소 내지는 청산이라는 선택지 사이의 틈새로 걸어가기를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동이 실물이 될 때 현실성이 생겨난다
노선은 누군가 걸어가야 노선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대학 내 담론으로만 그쳤다면 청년들의 고민이 아무리 급진적이거나 비장한 것이어도 대중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발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시진핑 초기 시절까지만 해도 당국이 대학 내에서는 다양한 담론이 오가는 것을 어느 정도 용인한다는 말을 어떤 연구자에게서 들었다. 그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체제에 반항적인 담론이 대학의 담장을 넘어서는 것은 통제된다고도 덧붙였다. 당국의 태도는 운동이 위력을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의 갈림길은 바로 실천에 있음을 방증한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묘사한 것처럼 학생들이 야학을 열고,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등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을 때 당국이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운동이란 틈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대중에게 그 틈을 보여주고, 함께 파고들자고 제안하는 것이 활동가들의 임무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 한국의 학생운동이 노학연대와 현장이전으로 그 길을 열었고 저자가 묘사한 중국 청년들이 대학과 지역에서 운동의 공간을 열고 투쟁을 만들어가는 게 바로 그런 작업들이다.
더 크게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를 실현 가능한 과제로 만들어내는 것도 운동의 영역이다. 반세계화 운동, 반전운동, 반핵운동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가까운 '비현실적' 목표를 향한 운동들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베트남 인민의 끈질긴 투쟁이 서방의 반전 운동을 낳고, 미국의 철군을 이끌어냈던 것처럼 누군가의 끈질긴 투쟁이 마중물이 되어 더 큰 운동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즉 비현실적, 몽상적이라는 비웃음을 걷어내고 한 발 한 발을 내딛을수록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파급력을 일으켜나가는 것이야말로 운동의 요체다. 어찌 생각하면 너무 뻔한 말이다. 하지만 그 뻔한 말을 현실에서 내 삶을 걸고 실천으로 옳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현실에서 한 발자국을 내딛는 일이 얼마나 큰 결단을 요하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가능한 것이던가. 불타는 초심으로 한 발 내딛었다 치더라도, 그런 삶의 태도를 견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내 운동을 되새겨보고 곱씹어 보는 것도 때때로 필요한 일이다. 그것이 설령 아무리 숙련된 활동가일지라도.
사회주의 운동이 역사적 패배를 경험한 이후 저항 담론의 큰 기둥이 사라진 지금, 각지의 민중운동의 어깨는 당분간 점점 무거워질 것이다. 운동이 차지하는 위상과 동력이 떨어지고, 재정과 인력이 축소되는 운동의 축소재생산의 흐름을 당장 역전시킬 묘책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을 분석하고 길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머리를 맞대는 수밖에 없다.
그 노력은 국내만이 아니고 동아시아라는 권역,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서 이루어질수록 풍부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동안 학술적 교류나 일회성 투쟁 말고 활동가들의 꾸준한 교류가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은 자못 아쉽다. 물론 활동가들끼리 나름대로 그런 끈을 갖고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교류의 과정을 목적의식적으로 소개하고, 더 활발한 국제연대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저자의 공이 크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바라는 것처럼 동아시아 각국의 활동가와 노동자, 청년들이 교류하고 서로의 운동에 영감을 주며, 국제운동을 만들어 나간다면 좋겠다. 각국의 상호 군사적 견제가 심해지고 문화적 적대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시기에 국제주의를 당위적인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그칠 게 아니라 실제로 논의도 하고, 집회도 열고, 가능한 투쟁을 만들어간다면 그 운동은 더 이상 바람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실물이 되고, 사람이 모이고, 힘을 얻을 것이다. 이 시대의 답답함을 풀어가기 위해 국경을 넘나드는 노력을 해온, 그리고 저술활동을 비롯해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저자에게 소심한 응원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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