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김애란, <비행운>

노양 2022. 9. 8. 00:32

  나는 한국 작가 소설을 즐겨 읽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읽기 전에 내 정신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차라리 다른 나라 이야기를 읽는 게, 추리소설을 읽으며 머리 쓰는 게 마음이 편했다. 흔치 않은 살인사건 같은 것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를 읽으면 그래도 먼 나라 이야기 같지 않던가? 사회파 소설들이 아무리 다양한 인간상을 담고, 일상까지 파고든 사회의 모순을 드러낸다곤 해도 일단 다른 나라 이야기는 다른 나라 이야기다. 일본 버블경제의 붕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많지만, <서른>에 묘사된 다단계의 늪에 빠진 한국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더 소름이 돋고 마음이 아픈 이유가 있다. 인류 보편 정서라는 게 있다곤 해도 일단 내 시간, 내 공간, 내 기억과 맞닿아있는 이야기가 내 마음에 울리는 우울감이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단편들 중에는 굉장히 일상적인 '비'행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 있다. <하루의 축>에서는 인천공항 청소노동자의 하루 일과에 남아 있는 한 생애의 흔적들이 하나 하나 펼쳐졌다.  <큐티클>에서 네일 케어를 받고 결혼식에 들렀다가 캐리어 사은품 때문에 카드도 만들고, 하지만 정작 캐리어가 필요했던 이유인 친구와의 여행은 취소된 '행운은 아닌' 사건들의 일상이 담겼다. <호텔 니약 따>는 '친구와 여행가면 싸움난다'던 속설이 몇 날 며칠의 여정 속에 증명되는 과정이었다. 헤어드라이기, 스피커, 캐리어 바퀴 등 흔한 소재가 갈등의 시작이 되고, 전 남자친구와의 통화 속에선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것이 지겨웠다'는 이별의 담담한 이유가 등장했다.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들 속에서도 '비'행운들의 결정적  소재들은 정작 굉장히 일상적인 것들이다. <벌레들>에서는 재개발지구를 내려다보는 절벽 위 맨션이라는, 조금은 흔치 않은 입지 위에서 일상이 전개된다. 하지만 주인공을 극한의 외로움과 고통으로 몰아넣은 것은 어쨌건 '재개발로 인해 아무도 없는 현장', '재개발 속에 쓰러진 고목', 고목이 쓰러진 다음 등장한 '벌레', 잃어버린 결혼반지, 때아닌 산통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건들의 연쇄였다. <물속 골리앗>에서도 주인공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은 재개발, 반대 투쟁,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망가져가는 남은 가족의 일상, 어머니의 지병과 같은 요소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엄청난 '불운'이 주인공들을 괴롭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행운이 아닌 사건들'이 주인공들의 하루를 구성한 것이다. <호텔 니약 따>나 <큐티클> 주인공 정도의 일상은 다른 사람들도 살면서 그리 어렵지 않게 겪을 수 있고, 겪었을 법하다. 거기서 좀 더 주변인들의 '비'행운적 사건이 더해지면 <하루의 축>이나 선배를 만나 TV에 출연하게 된 주인공의 하루가될 수 있고, 한 마을이 재개발이라는 사건을 겪게 되면 <벌레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삶을 애처롭게 만드는 사건들은 대부분 '불운'이라기보다 '비'행운들이다.

  '비'행운에 친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악몽을 꿀 때 가장 기억에도 오래 남곤 하는 내용이 시간에 쫓기고, 그래서 누군가와 약속을 어긴다거나 시험을 다 풀지 못하거나, 그래서 누군가를 실망하게 하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살면서 때로는 별 거 아닌 일에 하루가 우울해지기도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비'행운, 특히 오늘 일어난 것뿐만 아니라 예전에 일어나서 내 삶을 옥죄는 조건들(<하루의 축>에서 아들이 교도소에 있다는 조건도 갑자기 발생한 사건은 아니다.)이 나를 한없이 침잠하게 한다고 나만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거나 엄살 부리는 것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 위로가 되었다. 특별한 '불운' 때문에만 우울해 해야 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고정관념이거나 강박이 아니었을까. '비'행운들은 '불운'은 아니지만 인간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특별한 불운인 경우보다 하루하루의 '비'행운인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작품의 해제를 쓴 이가 말한 것처럼 여러 단편의 주인공들은 행복을 쫓다가 '비'행운을 겪곤 했다. 아파트에 살고 싶었다거나, 살던 집에 계속 살고 싶어했다거나, 여행을 재미있게 다녀오고 싶어했다거나, 삶의 자존심과 경제력을 지키고 싶어했다거나. 곧 사라질 '비행''운'을 쫓았다는 의미로도 제목을 지었겠거니 싶다. 주인공들은 비행기가 되어 그리 높이 날아오르고 싶다는 욕심을 부린 것이 아니었다. 완벽한 삶을 바란 게 아니고 이를테면 그중에 내 눈에 들어오는 요소들 몇 개 정도 쫓았을 뿐이다. 집, 여행, 돈, 가족...

  생각해보면 '비행'운을 쫓지만 '비'행운으로 범벅된 삶을 사는 것은 우리네 보통 삶의 모습이기도 한 것 아닌가? 거기서 오는 우울함도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이 아니고, 나만 유독 독특한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안도감이 든다. 내 삶만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의 삶도, 집을 구해서 살려고 애쓰는 삶도, 가족이나 친구나 짝사랑 대상과 애틋하면서 평범한 일상을을 살고 싶은 삶도 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조건에서 그런 꿈을 꾸는 삶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