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부터 손목이 뻐근했던 탓에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같은 부위를 예전에 군대에서 다쳤던 적이 있어서인지 이번뿐만 아니라 운동이나 다른 일을 할 때도 손목이 쉽게 피로해지는 느낌이 들긴 했다. 듣자하니 연골 부위는 혈관이 많지 않아 회복이 쉽지 않으며 일단 사용하지 않아야 치료가 빠르다고 한다. 손목도 일을 할 때나 아프지 쉴 때는 아프지 않은 정도라 다행이면서도, 일을 하긴 해야 하니 마음껏 놀릴 수 없다는 점이 걱정이다.
만약 맨 처음 다쳤을 때 초기 진화를 더 잘했다면 지금보다는 덜 도지고, 덜 고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군대에서 처음 다쳤을 때 군의관을 찾아갔더니 손목보호대와 진통소염제를 주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웬만하면 사용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보급계원이었고 손목을 쉬게 둘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체력단련 때 팔굽혀펴기를 비롯해 팔을 사용하는 근력운동을 열외하는 것, 창고 업무를 볼 때 손목보호대 착용을 잊지 않는 것 정도였다.
업무상 열외가 정말 불가능했던 것일까? 지금 돌이켜보니 왜 그리 무식하게 혹사를 했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집단 생활을 하면서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는 데 대한 수치심 내지 불안감이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군대, 특히 한국 군대는 수 백 명이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과정에서 각자가 하나 이상의 업무를 분담한다. 누군가는 운전을 하고, 누구는 유류를 관리하고, 밥을 하고, 보일러를 떼고...
사실 그런 업무들은 휴가나 질병 등 사유에 따라 충분히 대체 가능한 일들이고 대체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누구나 누리는 휴가와 달리 질병은 특정인의 특수한 케이스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군대에서 질병으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죄악시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신교대, 자대를 막론하고 간부들은 몸이 다치면 자기가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이고, 그로써 열외를 할 경우 자신은 물론 동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강조하곤 했다. 그만큼 군대라는 집단 내에서 질병의 예방과 회복은 오롯이 개인이 책임져야 할 사안이었다.
군대 밖 사회에서도 질병으로 인해 업무에 지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은 상당하다. 몇 년 전 메르스 사태에서 어떤 직장인이 고열에도 불구하고 중국 출장길에 올랐다가 메르스 감염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양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적이 있다. 직장에서 병가를 사용하면 평정이 나빠진다, 아파도 신입사원 때는 자기 연차를 쓰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관리자들이 공공연히 떠들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코로나19에 대처하며 아프면 출근하지 말라는 접근법이 등장했지만 이는 따지고 보면 '개인의 질병으로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논리의 다른 표현이다. 감염병을 전파시킴으로써 조직에 끼치는 피해가 더 크기 때문에 강조되었을 뿐이다. 코로나19 초기에 감염자 동선을 공개하며 유행의 책임을 앞선 감염자에게 떠넘기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접근이다. 감염병 아니고서는 아프면 나오지 말라는 소리는 못 들을 것이다.
"아프면 일단 쉬라"는 접근이 가능하려면 질병이라는 '재해'에 좀 더 너그러워져야 한다. 예상치 못한 수해를 입은 지역을 복구하기 위해 세금을 투입하고 군인과 자원봉사자들이 투입되는 것처럼 질병을 앓는 이도 지원과 지지를 받아야 한다.
노동계급의 성장과 함께 자리잡은 공공의료체계에는 질병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며 본인이 잘못해서 걸린 질병인지 묻지 않고 질병을 극복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본인 귀책인지, 얼마나 잘못해서 그 질병을 초래했는지 따지는 것은 공공의료의 취지와 반대되는 접근이다.
아프면 본인만 서럽다는 어른들의 말처럼 질병에 따른 업무 공백 이전에 고려해야 할 것은 환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지원이다. 아픈 사람의 입장에서 휴식기간을 부여하고, 의료부담을 지원해야 한다. 그 시각의 차이야말로 손목보호대와 약물을 처방하고 업무 수행 가능하면 열외 없이 수행하라는 접근과 큰 통증이 없더라도 최대한의 치유를 위해 필요한 만큼 얼마든 열외해도 좋다는 서로 다른 접근을 낳는 시발점이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년 5월 1일 세계노동절 (0) | 2024.05.02 |
---|---|
눈앞의 사람과 싸우기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0) | 2023.10.30 |
코로나 이후, 독감 같은 병에 걸리면 쉴 수는 있게 되었나? (2) | 2023.01.06 |
철도에 비가 내리면 (0) | 2022.07.14 |
이사 (0) | 2022.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