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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코 다케마루, <살육에 이르는 병> (약스포)

노양 2024. 9. 19. 01:39

  서술트릭이야말로 영상 장르가 따라잡기 어려운 글 장르만의 특기 아닐까. 평소에도 칭찬받는 서술트릭 작품이 있으면 눈여겨보곤 하는데 이 작품은 명성에 비해 좀 늦게 읽었다. 아무래도 검색하자마자 '잔혹성, 불쾌감이 동반될 수 있다'는 내용이 따라붙어서가 아닐까. (그런데 우리 구 도서관 중에는 학교 도서관에만 이 책이 있다.)

  말 그대로 결말부를 읽고나서 앞부분부터 쭉 다시 훑게되었다. 처음부터 서술트릭이라는 설명이 있어서 이런저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읽다가 중반부터는 포기하며 읽었더랬다. 말 그대로 '알면서 당한' 서술트릭인 셈이다.

  충격이 더 컸던 것은 소설 내 등장인물들이 놓친 것들이다. 서술트릭은 독자들이 등장인물의 생김새처럼 시각적 요소로부터 차단되어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끝에 가서 충격적인 것은 저마다의 등장인물들이 '속고만 있는' 피동적인 인물상이 아니라 작품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범인의 모습을 유추하고(히구치), 범인의 동기와 행적을 추측해보고(마사코) 있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잡고 싶었고, 근접했다고 생각했는데 말미에 가서 아, 모든 추리의 재료가 다른 사람을 지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의 충격은 독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추리소설의 재미는 전개되면서 하나 둘 드러나는 단서들이 범인을 좁혀갈 때 느껴지곤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매력은 그런 재미가 배신당할 때 느껴지는 충격과 쾌감에 있다. 독자들이 열심이 따라간 단서와 추측들은 왜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었나? 이 작품이 서술트릭이란 시각적 한계 하나에만 의존하는 얕은 기교가 아니라 몇 가지 인간의 인식적 한계들을 기둥삼아 세워졌기 때문에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트릭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사건은 작중에서 범인만이 알고 있다. 기자도, 히구치도, 피해자의 동생도, 이들에게 프로파일링을 제공한 교수도 몰랐긴 마찬가지다. 또한 범인과 접촉했던 바텐더나 피해자들마저 범인의 연령이나 신분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범인이 설정한 자기소개와 외모, 언행과 장소 정황(게임장, 술자리, 호텔 등)을 통해 '지금 여성에게 접근한 이 남성의 신분과 동기'를 한 방향으로만 유추했을 뿐이다. 마사코는 집안에서 남편과 각방을 쓰고 있었다. 신이치의 성적 취향과 자위행위 주기를 청소년기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편견을 낳고, 편견은 다른 사실들을 추론할 에너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혼자만의 추측에 빠져 미리 충격을 받고 일찌감치 앓아누워버린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 사건의 실체를 적접 목격한 히구치, 마사코, 신이치 각 인물은 사건의 실체에 저마다 다르게 접근했다. 신이치는 어떻게 사건의 진상에 접근할 수 있었고, 마사코는 왜 실패했을까? 왜 같은 집에 사는 나머지 두 가족은 아예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했을까? 마사코는 아들의 양육자라는 사명감과 관점을 갖고 뉴스를 보기 시작하며 성적 충동에 대한 추리를 시작했다. 마사코에게 주어진 단서는 히구치에 비하면 굉장히 많은 편이었지만 그가 시작부터 착용하고 들어간 관점, 아들 양육 과정에서부터 오랫동안 그에게 형성되어온 관점에 처음부터 끝까지 발목잡혀있었다.

 그에 비해 히구치는 현직 경찰도 아니라 주어진 단서는 극히 적은 편이었으나, 마지막까지 편견을 갖지 않았다. 호텔 사건현장을 목도하고 비록 그가 갖고 있는 재료를 가지고 '이 사람이 범인'이라고 확신한 적은 있지만 곧이어 집에 도착했을 때 바로 위화감을 느끼고 진입을 주장했으며 연행담당 경관의 언행을 마음속으로 책망했다. 20대부터 60대로 범인의 연령을 좁히는 것조차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서술트릭을 훌륭하게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노회하고 훌륭한 형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제멋대로의 프로파일링으로 제멋대로 전진했다면 (어쩌면 화자로 설정되지 않은 다른 경찰들이 그랬을 수 있겠다.) 책을 다시 뒤적이며 느꼈을 재미가 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히구치가 현직 경찰이었다면 수많은 목격진술이나 단서들을 통해 일찌감치 범인상을 달리 잡고 접근했을지도 모른다. 히구치가 단서로부터 차단된 뛰어난 시각을 가진 은퇴경찰이라는 설정이 가진 힘이다.

  이 작품이 서술트릭 기교를 위해 사용한 장치는 적은 편이다. 시간대 트릭도 유추해보았으나 구체적인 연도와 날짜, 통신수단이나 교통수단과 같은 시대상황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서술자의 정신착란도 없었다. 대신에 있음직한 인물들, 가질법한 선입관을 자연스럽게 이용함으로써 독자가 의심의 눈에 불을 키고 읽으면서도 서술자들의 시각과 생각에 자연스럽게 의존하게 되었다. 문자매체라는 특성뿐 아니라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 그것이 가족관계를 비롯해 관게 속에서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고유의 관점이든,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없는 신분적 한계 내지는 인식적 한계를 이용했기에 트릭의 충격파가 그만큼 더 깊었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