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이 책의 장점. 번역본이 아니라 한국어 화자가, 그리고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서술하였기 때문에 이해가 쉽다. 구성도 나쁘지 않다. 데리다, 아감벤, 바디우 등 포스트담론이라 불리는 계보에 대한 이해 바로잡기부터 시작하여 소위 '메시아주의'에 대한 비판, 알튀세르, 푸코, 발리바르의 논의를 활용해 한국 정치담론에 대한 저자 나름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포스트담론' 개념부터 바로잡기
저자는 '포스트담론'이라는 개념 자체가 미국 학계에서 붙인 손쉬운 이름표라고 비판한다. 포스트라는 딱지를 붙여 담론을 구분하고 비판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와 새로운 이론들 사이의 갈등관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역시 장애를 겪게 되"었고, 정작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 앞에서 마땅히 했어야 할 비판과 문제 설정을 수행하지 못한 현실을 돌아본다(p.51).
저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은 첫째, 포스트 담론을 그저 과거 마르크스주의와 단절하고 기존의 운동을 청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조류, '포스트담론'을 형성한 사상가들은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라는 과제에 직면하면서 그 이유들을 펼쳐본 것인데, 정작 한국에는 그 내용에 대한 고찰이 생략된 채 결론만이 수입된 것이다. 둘째, 이를 비판하긴 하나 그간 이행이라는 과제 수행이 실패한 이유를 되돌아보지 않는 메시아주의 조류다. 벤야민, 지젝이 이에 해당한다.
다만 저자는 단절과 폭력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 일침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데리다의 담론이 "차이와 이질성을 산출할 수 있는 근거, 적어도 그 계기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놓치지 않는다(p.167). 여기까지가 1부였으니, 그 사이에서 길을 찾아가는 것이 이후 글들의 과제로 읽힌다.
정치공동체를 바꾸기 위한 주체의 발명을 위하여
저자는 극단의 주장을 배제한다. 국민국가나 민족을 부정하는 담론은 공동선으로서 국가의 성격, 민족주의의 긍정성을 모두 배척하게 되는데 현실에서 저항의 자양분이기도 했던 측면들마저 거세하고 나면 운동의 가능성을 축소하는 효과만 낳는다는 비판으로 읽힌다. 그래서 국민국가에 대한 '내재적 비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특히 신자유주의적 예속화 양식을 현시기 운동이 맞서 극복해야 할 과제로 설정한다. 이를 위해 권력이론에 탁월한 시각을 보인 푸코의 담론을 따라간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의 유산과의 연계를 논하기 위해 알튀세르와의 비교를 거치며, 대부분의 글이 발리바르가 제기한 비교적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과제로 마무리된다. 민주주의, 봉기의 정치, 시민다움이 그것이다. 프레이저가 제기한 과제, 수탈, 전유와 같은 배제 메커니즘에 맞서는 새로운 '틀짜기', '재현(리프리젠테이션)'의 과제로 도달하곤 한다.
다만, 여전히 남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자유주의적 예속화' 매커니즘이 자본주의 일반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인가? 저자를 비롯해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영향을 받은 논자들이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와의 단절점으로 흔히 신자유주의를 꼽곤 하는데, 여전히 그것이 질적으로 다른 매커니즘인지 잘 모르겠다. 역사성과 변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점과 틀거리가 맞을까에 대한 여전한 의구심이다. 본서에서 저자가 말하는 신자유주의 예속화 매커니즘 즉 인간주체를 '기업가'로 변신시키는 효과가 신자유주의의 출현과 함께 일반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둘째, 새로운 틀짜기와 주체형성의 과제를 현실에서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포스트담론에 대한 성찰이 가능해진 시기라는 것은 2020년대 운동에 주어진 그나마 좋은 토양이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무엇보다 촛불시위라는 거대한 정치적 변화기에서도, 역설적으로 포스트담론을 이용하거나 무작정 비판한 담론과 활동도 이렇다할 정세적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조와 비약이 난무하는 담론장의 거품을 걷어내고 운동의 폐허를 잔잔하게 응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긴장을 인정하며
이제 소위 포스트담론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포스트담론'은 '왜 혁명이 발생하지 않는가?', '마르크스주의가 설정한 주체는 왜 이행의 주체로 현실에 나타나지 않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성찰과 답변인 셈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부정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한 게 아니다.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죄가 아니듯 '포스트담론'은 마르크스주의의 한 유산이자 혁명적 고양기부터 침체기에 산업노동자들과 함께했던 시대가 남긴 중요한 질문들이다.
이러한 담론들을 손쉽게 넘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본주의의 내적 동학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타 사상과 구분되는 지점인데, 노동계급은 시대에 따라 형태를 달리했을 뿐 실존하며 내적 동학에 따라 혁명적 잠재성이 있다, 그것을 분출시키는 것이 과제라는 말로 마무리짓는 것이다. 포스트담론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내적 동학을 부정하기 때문에 쓸모없고 손쉬운 해결책(자유주의 세력과의 제휴, 연대)으로 귀결된다는 비판이 따라붙는다. 두 번째는 저자도 비판했듯 말 그대로 '포스트' 시대에 걸맞는 '포스트담론'이라는 관점으로 수용하여 청산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이 두 가지 경향에 대한 충실한 비판이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생각이 현실 강령 수준으로 구체화된다면 아마 동의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저자가 그런 수준의 논의를 펼치는 책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고 곱씹어본 자세는 단순화와 청산의 유혹을 이겨내고 담론 사이의 긴장을 인정하는 것, 역사적인 고찰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애도에 대한 애도야말로 저자가 제안하는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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