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 끝나고 친구랑 술을 마시다 여섯 시간 넘게 떠들었다. 평소에도 이야기를 나누면 결코 심심하진 않은 친구였지만, 그사이에 남태령과 한강진을 거쳐 광화문까지 온 뒤에 만나니 새삼 더 새롭고 재미있었다. 술집이 문을 닫으며 강제종료되는 대화를 나눠본 게 얼마만이던가..?
어느덧 30대 중반을 넘어서는 나이에다 우리가 처음 알게 된 지도 벌써 15년이 넘었다. 몇 달에 한 번씩은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깊고 얕은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그는 매번 그간에 있었던 드라마틱한 연애 이야기와 아버지와 얽힌 소식을 갱신해서 들려줬고, 서로 그때그때 갖고 있던 고민들도 몇 마디씩은 나눴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책모임 한 번을 함께 해본 적이 없었고 생각해보니 술 없이 대화를 해본 적도 없었다. 같은 집회에 나간 딱 그 횟수만큼 감수성이 비슷할지언정 정치적 견해도 다르고 삶의 궤적도 속도도 달랐다.
숱한 술자리에서의 이야기는 거의 기억에 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늘 흥미로웠는데, 어떤 경험이든 이슈든 나름대로의 해석과 생각을 늘 덧붙여서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본인도 그 포인트를 자각하고 있는지, 반대로 그는 대화의 상대인 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흡입력 있는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답게 그는 구구절절 곁가지를 이야기하거나 삼천포로 빠지는 법이 없었고 늘 핵심만, 기승전결을 갖춰서 자기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어제처럼 대여섯시간 넘게 계속 술을 마시면서도 말이다.
그러다보니 어느정도 나는 이 사람의 고민과 대화주제와 레파토리를 대강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30대 중반을 넘어서니 아마 서로의 생각도 별로 변함이 없을 것이고, 만나서 대화하면 즐겁긴 하지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생각이 변화하는 고통과 재미는 아마 더는 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생각할 줄 아는, 대화하는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런 편견마저도 날려버리고 새로운 재미를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8년 전 광화문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후세에 대한 관점도 3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이 시점에 처음 들었다. 여의도에서 남태령을 거쳐 한강진까지 개근을 하게 된 이유와 마음가짐을 들으니 내가 이 친구와의 대화를 재미있어하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대화를 하다보면 때론 나의 넘겨짚음과 짦은 생각이 부끄러웠고, 때론 함께 이 시대에서 느끼는 막막함과 답답함에 침잠하기도 하며, 때론 내 생각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자존심 세우거나 부끄러워함 없이 털어놓을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단 느낌이 들었다.
실천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내가 더 자주 투쟁현장에 나갔으니 미처 몰랐던 사실이지만 이 친구는 조직에 가입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느끼고, 자기가 판단해서 집회에 나갔던 사람이었다. 오히려 대단한 것 아닌가? 생각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의 논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제 술자리를 함께하니 새삼 내가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참 복받은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앞으로도 자주 볼 일은 없겠지만 가끔가다 보게 되면 가뭄에 단비 만나듯 반가우리라고 감히 확신해본다. 그리고 이런 친구가 내 20대 과거를 다 알고 생각보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 15년동안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 셈이니... 막막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며 두런두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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